연명의료결정법과 '4% 병원'
  • 기사공유하기
연명의료결정법과 '4% 병원'
  • 안창욱 기자
  • 승인 2018.04.05 06:2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DNR 빠지고 대리결정 불인정
"왜 의료기관윤리위를 반드시 설치해야 하나요?"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초점]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두달

회생 가능성이 없어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등을 통해 생명을 연장하는 연명의료를 할 것인가, 아니면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따라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거나 시행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할 것인가?

올해 24일부터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면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거나 유보할 수 있는 합법적인 길이 열렸다.

하지만 시행 두 달이 지났지만 의료현장에서는 연명의료결정법이 되레 연명의료를 고착화시키는 주범이라는 비판까지 나올 정도로 반응이 싸늘하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 등록 현황 지표 하나만 보면 연명의료결정법의 현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임종을 앞둔 환자 스스로 연명의료 중단 또는 유보 의사를 표현하는 서식인 연명의료계획서. 환자가 이 서식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해당 의료기관에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반드시 설치되고, 보건복지부에 등록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임종기 환자는 의료기관윤리위원회가 설치된 의료기관에서만 연명의료 중단 또는 유보라는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한 의료기관은 전국적으로 몇 개나 될까?

의료&복지뉴스가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2달째를 맞는 4일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확인한 결과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한 의료기관은 124개로 집계됐다.

상급종합병원 43, 종합병원 301, 병원 2995개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3339개의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이 있지만 이 중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한 의료기관은 4%에 지나지 않는다.

요양병원 역시 서초참요양병원, 강남구립행복요양병원, 송파참노인전문병원, 성북참노인전문병원, 가은병원, 보바스기념병원, 가족사랑요양병원, 효사랑가족요양병원, 효사랑전주요양병원, 안동노인전문요양병원, 예손요양병원, 희연병원 등 12개에 불과하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명의료결정법은 1997년 보라매병원사건과 2009년 김 할머니사건이 직접적인 발단이다.

보라매병원사건은 뇌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던 환자의 부인이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퇴원시켜 인공호흡기 착용을 중단하면서 비롯됐다.

이 사건으로 환자가 사망하자 환자 보호자에게는 살인죄가, 환자를 퇴원시킨 담당 의사에게는 살인방조죄가 적용됐고, 법원은 이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 이후 의료계에서 인공호흡기 중지=살인이라는 인식이 펴지면서 연명의료 중단에 대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됐다.

김 할머니 사건은 의학적으로 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남긴 사전의료지시나 환자 가족이 진술하는 환자의 뜻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고 대법원이 판결한 것을 의미한다.

의사들은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연명의료 중단 또는 유보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어 방어진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2013년 연명의료 중단 등의 결정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준과 내용을 제시하면서 특별법 제정을 권고했고, 2015년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 대한 연명의료 유보 및 중단에 관한 법안을 제안하면서 법 제정 결실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의료현장에서는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에 대해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있을까?

DNR(심폐소생술금지동의서) 제외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은 이미 시행중인 인공호흡기와 같은 치료를 중단 또는 중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연명의료 유보는 병원에 입원중인 말기환자에게 갑자기 심정지가 발생했을 때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거나 호흡곤란이 악화된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적용하지 않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에 따르면 연명의료결정법 적용 대상이 되는 환자는 1년에 2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15~17만명이 연명의료 유보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기 이전 요양병원들은 말기환자에게 심정지가 발생할 것에 대비해 환자 보호자로부터 DNR을 받아 환자의 고통만 가중시키는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았다.

반면 연명의료결정법에서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반영하는 서식으로 건강할 때 미리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중병으로 입원했을 때 작성하는 연명의료계획서두 개만 인정하고 있다.

그림: 서울아산병원 김선영
그림: 서울아산병원 김선영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요양병원은 과거처럼 말기환자의 보호자로부터 DNR을 받아 갑작스런 심정지가 발생한 경우 심폐소생술을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DNR이 법정 서식이 아니어서 누군가 환자의 뜻에 반해 의료진이 연명의료를 하지 않았다고 고발할 경우 보라매사건의 악몽이 재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허대석 교수는 영국, 캐나다, 호주와 같은 나라에서는 말기환자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등의 동의로 DNR을 받아 연명의료 유보 절차를 시행하고 있다면서 연명의료 유보 서식으로 DNR을 인정하지 않으면 의료기관의 혼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리결정 불인정

허대석 교수는 미국은 보호자가 연명의료 중단 내지 유보를 대리결정할 수 있지만 한국은 본인이 서명한 경우에만 유효하다고 본다면서 임종기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이렇게 까다로운 법을 적용하는 나라는 없다고 못 박았다.

의료기관윤리위 설치해야 연명의료결정

연명의료법 제10조에 따르면 말기환자 등은 의료기관에서 담당 의사에게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요청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법 제14조에 따르면 연명의료 중단, 유보 결정 및 이를 이행하는 의료기관은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두 개의 법 조항을 종합하면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는 자신이 입원한 병원의 담당 의사에게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요청할 수 있지만 만약 해당 병원에 의료기관윤리위가 없다면 의료기관윤리위가 있는 병원으로 전원해 연명의료계획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병원이 의료기관윤리위를 구성한 후 보건복지부에 등록하지 않으면 입원환자가 사전연명의료계획서나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했는지 검색조차 할 수 없다.

연명의료 중단 내지 유보 이행 절차
연명의료 중단 내지 유보 이행 절차

대학병원에서 말기암 판정을 받아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한 뒤 요양병원에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의료기관윤리위가 설치돼 있는지 확인한 후 전원해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A요양병원 원장은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고, 환자의 뜻에 따라 연명의료를 유보하는 절차를 밟는데 왜 반드시 의료기관윤리위를 설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그렇다고 정부가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운영비를 지원해 주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질타했다.

문서 작업이 너무 많다

국제적으로 연명의료 여부를 결정하는 서식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연명의료계획서, DNR 3가지이며, 다른 부차적인 서류를 요구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나라는 이들 서류 외에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판단서,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에 대한 환자 의사 확인서,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 이행서를 추가로 작성하라고 의사에게 요구한다.

경북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류현욱 교수는 환자 판단서와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 이행서는 보다 더 상세한 내용으로 의무기록에 이미 기술되어 있으므로 따로 서식을 작성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의무기록으로 갈음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보상은 없고, 처벌은 있다

보건복지부는 연명의료 중단 또는 유보 결정 및 이행을 하는 의료기관에 대해 수가를 지급하는 시범사업을 시행하고 있지만 요양병원은 비용을 받을 수 없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연명의료 대상이 되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 4가지 의학적 시술이 모두 가능한 의료기관에 한해 말기환자 관리료, 연명의료계획료, 연명의료이행관리료, 연명의료결정협진료 등을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환자의 의사에 반해 연명의료를 하지 않을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허대석 교수는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타이완에서만 연명의료 결정과 관련해 벌금을 부과하지만 다른 나라는 별도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며 "의료진과 환자 가족이 공모해 환자에게 불리한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해 한국은 규제 중심으로 법을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DNR을 인정하지 않고,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하면 보상 한 푼 받지 못하면서 연명의료와 관련한 업무만 가중되고, 자칫 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면 어느 의료기관이 이 제도를 반길까 싶다.

의료&복지뉴스 '회원가입' 하시면 더 많은 정보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요양 2018-04-05 07:50:46
제발 따를 수 있는 법을 만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