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무실한 연명의료 중단 '자기결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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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무실한 연명의료 중단 '자기결정권'
  • 안창욱
  • 승인 2018.06.19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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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 제도개선 촉구
"입법취지 제대로 지켜지고 있고 있다"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

서울대병원 허대석(내과) 교수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두고도 연명의료 중단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례를 소개하며,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나섰다.

허대석 교수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유명무실한 '자기결정권''이라는 주제의 글을 올려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허 교수가 소개한 환자 사례는 아래와 같다.

요양병원이 70대 후반의 할아버지를 기관지삽관 상태로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이송했다. 당시 환자는 의식이 없었다.

10년 전 편도선암으로 수술과 방사선치료를 받고 큰 문제없이 지내왔지만 올해 초 편도선암과 별개로 폐암이 발견됐고, 이미 뼈와 간 전이가 있어 항암제 치료만 받아왔던 환자였다.

항암제 치료는 3주 간격으로 이뤄졌는데, 거동이 점점 힘들어져 치료를 받지 않는 기간에는 요양병원에 입원해 간병을 받고 있었다.

3차 항암제치료를 받은 뒤 요양병원에서 폐렴 의심소견이 있었고, 전신상태가 점점 악화되더니 의식이 저하되고 산소포화도가 떨어졌다.

맥박이 거의 만져지지 않게 되자 요양병원 당직의사는 15분간 심폐소생술을 하고, 기관지삽관을 했다. 인공호흡기가 없는 요양병원에서는 더 이상 진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구급차를 불러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전원했다.

서울대병원은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겨 인공호흡기 등 연명의료를 시작했다.

문제는 환자가 폐암으로 진단된 직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본인 의사를 분명히 했고,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전산망에도 등록해 뒀다.

환자는 사망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인공호흡기를 중단하고 편안히 임종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3주간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여러 가지 연명의료를 받았으며 고통스럽게 사망했다.

[요양병원 당직의사의 입장]

환자 보호자들은 환자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고 당직의사에게 구두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당직의사는 해당 환자가 임종기임에도 불구하고 심폐소생술과 기관지삽관을 했다.

왜냐하면, 요양병원의 경우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구성할 수 없는 병원이 대부분이어서 환자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전산망에 등록해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고, 해당 요양병원은 임종기 판단이나 연명의료결정을 할 법적 자격이 없기 때문에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의료기관이 연명의료 중단 등의 결정을 하고, 연명의료 중단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따라서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하지 않은 요양병원은 허대석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전산망에 접속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확인할 수 없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임종기환자라 하더라도 당직의사 입장에서는 연명의료를 중단하거나 유보할 법적 권한이 없어 심폐소생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국의 1400여개 요양병원 중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한 곳은 20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종합병원, 병원의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설치율 역시 각각 27%, 0.4%에 불과하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는 위원장 1명을 포함해 5명 이상 20명 이하의 위원으로 구성하되, 해당 의료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종교계·법조계·윤리학계·시민단체 등의 추천을 받은 사람 2명 이상을 포함시켜야 한다.

아울러 윤리위원회가 필요한 심의, 상담, 교육, 통계분석 및 평가 등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운영지침을 만들고, 적절한 시설과 상담실, 전담부서 및 상담인력을 확보해야 하며, 수시로 연명의료 정보처리시스템에 보고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운영비 지원은 전무하고, 환자 측에 일정한 비용을 청구할 수도 없다.

그러다보니 병의원들은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설치를 꺼리고 있다.  

[환자 가족의 입장]

환자가 법정 서식을 이미 작성해 두었음에도, 보호자(직계 자녀들) 중 어느 누구도 나서서 이미 적용된 인공호흡기를 중단하자는 의견을 주도적으로 제안하지 못했다.

[서울대병원 의료진의 입장]

환자 상태가 임종기라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지만 환자 가족들이 적극적으로 중단의사를 표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의료진이 강제로 중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울대병원 의료기관윤리위원회의 입장]

환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는다고 표현했지만 가족들이 중단결정에 미온적이어서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안건으로 상정됐고,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결론냈다.

문제는 환자 가족의 협조가 없어 강제집행할 방법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허대석 교수는 "정부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로 본인 의사를 문서화하면 불필요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고 편하게 임종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의료기관 중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여부를 전산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병원은 4.3%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와 같은 작은 규모의 의료기관은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연명의료 결정을 할 법적권한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기관에서 작성해 전산시스템에 입력해둔 연명의료관련 서류조차 열람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허대석 교수는 "2000년부터 말기 환자에 대해 연명의료결정법을 실시해온 대만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건강보험카드를 전자화해 환자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전자카드에 내장하도록 해 어느 의료기관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전산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게 제도화했다"고 환기시켰다.

허대석 교수는 "자기결정권에 의해 연명의료결정을 할 수 있게 한다고 법을 만들었지만 진료현장에서 입법취지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못하다"면서 "관련 절차를 합리적으로 개선해 말기환자들이 불필요한 고통을 겪으면서 임종하는 일을 최소화하는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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